2010년 11월 3일 수요일

글쓰기의 중요성

학부 학생들에게 글쓰기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많은 학생들은 "써야하는 것"이라고 말할 듯하다. 백일장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은 서로 무엇을 쓰는지 훔쳐보는 것처럼.

내가 학부생일 때도 큰 차이는 없었지만 점점 신입생들의 글쓰기 능력은 떨어진다고 느껴진다. 분명히 우리보다 더 비싸게 돈을 주고 논술수업을 받았을텐데.

상당수의 글은 짜임새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무슨 글을 써야하는지 무딘 것 같다. 글 속에 여러 주제가 섞여있고 하나로 뭉쳐지지 못한다. 왜 그럴까? 상당히 많은 논술 수업은 강의자료를 제공한다. 강사가 꼼꼼히 정리해둔 자료는 학생들이 글을 쓸 때 참고하는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자료이다. 바로 그 자료가 학생들의 시야를 한정해버린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은 강사의 문제점으로 치부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도 명백한 문제가 있다. 공부를 비재화(bad)로 생각하고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강사가 주는 것만 하게 된다. 학생들이 행하는 최대한의 검색은 네이버 지식인이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할까? 다들 글쓰기 싫어하니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간단히 트위터처럼 140자 내로 글 쓰기로 하면 될까? 하지만 140도 다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아무리 드라마처럼 살고 싶다고 하더라도 글 못 쓰는 사람을 누가 채용하려고 할 것인가?

이 글은 어떻게 글을 써야하는 지에 대해 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최근 나의 생각을 잠시 담아놓는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개인 목적의 글을 읽으면서도 느끼는 바가 크다면 당장 펜을 잡고 글을 써보자.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읽어보자. 얼굴이 화끈거린다면 당장 글쓰기의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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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5일 일요일

유재석, 사...사사. 존경합니다.

버라이어티가 더 이상 버라이어티가 아닌 한 편의 영화가 되었다. 어제(10/7/24) 무한도전에게  전해줄 찬사이다. 우리가 유재석을 보면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싶다. 어떻게 말벌에 쏘이면서까지 라디오 생방송에 참여하며 노래를 부르고 격렬한 춤까지 춘단 말인가. 우리, 아니 적어도 나 조차 유재석을 보기에 부끄러워진다. 어떻게 저런 프로정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요즘 미디어에서 '존경하고 싶은 인물'은 흔치 않다. 게다가 개그맨이면 더욱 그렇다. 항상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 때문에서 일까, 그들의 내면을 보기가 더욱 어렵다. 그런데 유재석은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지만 감동도 같이 준다. 그의 내면을 느끼면 느낄수록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내가 저렇게 노력해본 적이 있었을까?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당신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입니까?

어제 영화 '인셉션'을 보았습니다. (스포일러는 없으니 걱정마세요.) 최근 인간의 상상력을 가늠할 영화를 못 보았는데 드디어 보았습니다. 최근 헐리우드 영화는 관객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충분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객의 상상력을 무너뜨릴 기술은 자주 나타나지 않습니다. 관객은 익숙한 줄거리를 다른 틀에서 보고자 영화관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비단 영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비자의 상상력은 누가 무너뜨리죠? 소비자는 신제품을 통해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익숙한 경험을 즐기기 위해서 신제품을 구매하지 않죠. 그것은 기존의 제품이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래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익숙한 경험은 지출유인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혁신이 중심인 사회는 영화관이든 쇼핑몰이든 소비자의 상상력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대체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입니까? 당신은 새로운 상상력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하루를 길게 쓰는 방법

하루를 길게 쓰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몇 년전 인기를 끌었던 '아침형 인간'이 생각납니다. 저도 가끔은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고자 일찍 일어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렇게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고, 오늘 또 아침에 일어나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계속 실패할까요? 하루를 길게 쓰겠다는 것이 목적인데, 목적에 부합한 결과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컨디션을 새로운 시간대에 맞추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치 시차 적응하는 것과 같지요. 새로운 시간대에 가서 적응하는 것은 그 사회에 적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시간 대에 다른 시차에 몸을 적응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뚜렷한 주관이 없다면 더 그렇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차는 동시간대의 사람들과 다른 시차를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페이스를 잘 유지해야 하지요. 오늘 새로운 시차에 적응하려고 집에 일찍 왔습니다. 하루를 돌아보면서 무엇이 나의 페이스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잘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일단 몇 일 더 이렇게 지내보아야 알겠지요. 페이스만 잘 조절하면 아침형 인간이 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하튼 기분 좋네요.

창의적인 기업에 가고 싶으면 창의적인 사람이 되자

20대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요? 좋은 첫 직장을 구하고 싶은 것이죠. 그런데 물음표가 하나 생깁니다. '창의적인 회사로 가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창의적인 회사로 갈 수 있죠? "구글에 취직하려면 어떤 스펙을 쌓아야 할까요?"라는 질문 속에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창의적인 기업은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합니다. 그럼 어떻게 창의적인 인재를 구별해낼까요? 한 사람의 주관이 뚜렷한지, 자신의 분야에서 남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이런 것은 기업이 원하는 '스펙'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창의적인 인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깊고 다양한 사고와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은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왕도가 없지요. 쉽게 쌓은 돌담은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단련을 해야 합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길은 정답이 없습니다. 16년 동안 교육을 받고 대학을 졸업하는 많은 학생들은 여전히 '정답'을 찾고 있습니다.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자신의 답을 찾아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회에서 규정(?)했다고 믿는 정답을 쫓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비슷한 경로에서 경쟁을 하게 되지요. 그럼 누가 경쟁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요?

저는 사회가 정답을 규정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정의한 정답이겠지요. 사회는 생물계처럼 정말 무궁무진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답은 없고 자신의 답만 존재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 입니다. 창의적인 기업이 원하는 인재들은 자신의 답을 가지고 있는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

혹자는 제가 창의적인 기업에 속해있지 않기에 믿기 어렵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작년 초 관심 있었던 모 컨설팅기업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미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였기에 단 한 개의 기업에만 입사지원서를 썼지요. 낙방하였으나 그들은 아주 친절하게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저의 경험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낙심하였으나 솔직히 이야기해준 그 기업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저는 그들의 예측을 보기좋게 무너뜨리기 위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그렇죠. 그리고 대학원 공부는 그 무엇보다도 창의적이여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야 하기 때문이죠.

스펙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창의적이기 위해 노력하세요. 그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일단 자신의 상식부터 해체해야 하니깐요.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식은 18세 이전까지 자신이 쌓아온 편견이다라고요. 우리의 편견을 무너뜨리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의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러분들은 창의적인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2010년 7월 22일 목요일

한국교육에 필요한 것은 철학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는 동안, 교육은 비대칭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대학진학률이 가능한 최대치에 가까이 올라와서 그런지, 아니면 교육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한국의 교육모델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는 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저는 두 가지가 모두 타당한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압축성장에서 발생되는 회의감이기 때문입니다.

Barro-Lee(2010)의 Educational Attainment 자료를 보면, 15세 이상 인구의 평균교육년수는 1950년에 4.5년에서 2010년 현재 11.8년입니다. 60년 동안 7.3년이나 증가한 것이지요. 반면에 미국은 1950년에 8.4년에서 2010년 현재 12.2년입니다. 이것을 보면 한국은 정말 고속성장을 한 것이지요.

그럼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이 글의 목적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교육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최근 교육계 이슈는 핀란드형 교육제도입니다. 이것은 학생들이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교육환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교육제도를 찾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핀란드형 교육제도에 관한 책으로 후쿠다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혁명'을 추천해드리고, 후자로는 박하식의 '좋은 학교를 넘어 위대한 학교로'를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현재 서점가에 정말 다양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들은 명료하게 교육철학을 짚어내었기에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자녀교육을 위해 어떤 학교, 어떤 학원, 그리고 어떤 교재를 선택하느냐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육철학의 부재 속에서는 학부모와 아이들 모두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철학입니다.

애플의 학습효과

얼마전에 박경철 원장님이 경제포커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애플의 성장이 삼성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요. 저도 동의합니다. 애플은 시장의 게임을 바꾼 것 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지향해야 하는 점도 분명히 알려주었지요.

대표적인 사례가 아마존의 킨들(Kindle)이라고 생각합니다. 애플이 iPad를 출시하면서 타겟으로 삼은 고객층 중의 하나가 eBook 유저들입니다. 이를 위해 애플은 eBook 앱스토어를 준비했구요. 그런데 이 분야의 선두주자는 킨들입니다. 얼마전 기사를 보니 아마존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킨들용 eBook이 hardcopy 판매량을 초과했으며, 앞으로 다양한 기기에서 킨들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한다구요. 애플이 iOS를 통해 전자책을 공급하지만 아마존은 애플을 비롯한 많은 모바일 디바이스에 전자책을 공급할 수 있게끔 한답니다.

이것이야 말로 애플이 이뤄낸 학습효과가 아닐까 싶네요. 물론 전자책의 보급정도는 높지 않지만 경쟁의 초기조건은 아마존이 잘 만든 듯 싶습니다. 이제 전자책 시장에 진입하지 않은 잠재적 진입자를 위한 진입장벽이 확실히 생겼습니다. 바로 '확장성'입니다. 애플의 학습효과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기업과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확장성'을 보유하지 못한다면 시장을 얼마나 지배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2010년 7월 21일 수요일

최고 수준의 학문연구를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

작년 가을학기 때 대학강의에서 접할 수 있는 끝판왕(?) 강의를 들었습니다. 매주 과제를 제출하고 퀴즈를 보며 시험도 세 번이나 보았지요. 물론 그 정도 시험이 얼마나 힘드냐라고 타박하실 분들도 계시지만, 저희 학교에서 그 수업은 가히 전설적입니다.

교수님께서는 강의 홈페이지를 개설해놓으셨는데 학기 중에는 열기가 뜨거워서 가끔씩 느끼려고 가보기도 합니다. 이번 학기는 나태해진 내 자신을 반성하기 위해 종종 갔었지요.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정신차리곤 했습니다.

이번 여름도 자칫 느슨해질까 걱정되어 오랜만에 교수님 홈페이지를 가보았습니다. 새로운 자료가 하나 업데이트 되었더군요. '연구실 신입생 메뉴얼.' 두근거리는 마음에 메뉴얼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최근에 가장 많이 고민했던 그것을 발견하고 말았지요.

'최고 수준의 학문연구를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

흔히 대학생을 '지성인'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대학교육을 받거나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성인에 대해 높은 기준을 잡고 있지만 여전히 higher educated person입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대학교육을 왜 받을까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대학생을 지성인이라고 하는데 저는 지성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지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교육을 받지만 지식생산에 참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한국교육은 여전히 lecturer 위주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강의는 많은 지식을 단시간에 받아들이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생산보다는 습득에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우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는 모른다는 것이죠.

제가 중등교육을 받을 때를 떠올리면 이 말이 생각납니다. "이 과목들 배워도 나중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우리가 써먹을 지식을 배우려면 습득위주의 교육보다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습득위주의 교육은 필요합니다. 혁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습득이 혁신에 영향을 주는지는 배우지 못했죠. 그것은 자신이 직접 찾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긴 학창시절 동안 습득만 하였고, 경험을 못했습니다.

제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습득을 할 수 있을까? 수능공부를 할 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가급적이면 드러내지 않으려고 헀었죠. 다른 학생이 저보다 성적이 잘나오게 되면 안되니깐요. 어떤 교재가 좋다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떤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이런 것이 하나의 고급정보가 되어서 유통채널 하에서만 공급이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쩌면 제가 각박한 환경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부 학생들이 학교 사물함에 책을 보관하는 것을 꺼려하는지 이유를 들어보면 각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대학생이 되어도 저는 경험을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우리, 그리고 내가 왜 그리 공부를 해야하는지 알려주지 않거든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라는 가장 보편적인 답은 존재하지만 말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지요.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지식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입니다.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배운 지식을 가공해야 합니다. 그 과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이루어지지요.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경험'입니다. 글 쓰는 능력을 단련하는 과정이 '경험'이고 이것이 지식생산의 도구입니다.

처음 글쓰기는 어렵지요. 바로 '경험'은 우리가 직접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련을 통해 글 쓰는 능력이 좋아짐에 따라 내가 배운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지식의 습득은 활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경험'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습득과 글쓰기라는 경험이 함께 있어야만 지식을 활용할 수 있고 이것이 혁신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지식의 공유는 경험을 더 단단하게 해줍니다. 아무리 글을 잘 읽더라도 그 글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 습관에 길들여지면 경험할 수 있는 채널이 사라지게 됩니다. 지식은 공유가 될수록 시너지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죠. 좋은 정보만 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훈련을 하면서 경험을 쌓고 타인과 지식을 나눔으로써 단련이 됩니다. 저는 이것을 간과했었던 것이죠. 저는 지성인은 지식을 생산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저는 생산할 줄 몰랐기에 지성인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지금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도 질 좋은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인데도 말입니다.

'최고 수준의 학문연구를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에서 저는 '기여'를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학문연구를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기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께서 콕 찝어서 말씀하시니 부끄럽네요. 이제는 부끄럽지 않으렵니다.

기술을 재주껏 이용하는 Steve Jobs

잡스가 2007년에 아이폰을 출시한 이후로 연일 전세계 언론에 수없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21세기 대표적인 혁신 아이콘으로 추앙받는가하면, 폐쇄적인 정책에 대한 반발도 많죠. 하지만 중요한 점은 잡스는 20세기에 개발된 많은 기술들을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거죠. 노키아, 모토롤라 등과 같은 기존의 경쟁자들을 잡스가 물리치고 시장의 선두주자로 등극한 이유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신경제(New Economy)'라는 용어이지요. 1960년대 후반부터 20년이 넘도록 미국의 성장률은 지체되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성장률은 기대이상으로 높아졌지요.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이 신경제입니다. Paul Krugman은 그의 저서 '경제학의 향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90년대 경제성장은 20년 전에 발명된 기술들이 경제 전체 보급되면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또 산업혁명 시기로 거슬로 올라가 봅시다. 산업혁명을 떠올려보면 다들 '증기기관'을 생각할 겁니다. 산업혁명의 아이콘이지요. 하지만 산업혁명 시기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산업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증기기관은 효율성이 낮고 비용이 비쌌기 때문입니다. 즉, 신기술이 발명이 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90년대 고성장은 기술의 확산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잡스는 역사의 흐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바로 20세기에 만들어진 많은 기술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집약하여 제품을 만든 기업가입니다. 혹자는 애플이 연구개발 투자비중이 높지 않으면서 이윤율이 높다고 말하면서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서 생각해본다면 잡스는 신기술들이 저렴하게 상용화될 수 있는 시점에서 이를 가장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기술을 만드는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신기술을 가장 잘 집약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돈을 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지요. 신기술을 만드는 데 자원을 투입하고 있는지, 신기술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지, 아니면 신기술을 따라잡는 데 노력하는지 말입니다.

2010년 7월 20일 화요일

현재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보기

누구나 한 번쯤 역사 공부를 해보았을 겁니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하고 평가하는 하나의 과정이지요. 그런데 역사학을 공부해보면 하나의 사건을 어느 시대에 바라보는지에 따라 그리고 어느 집단이 바라보는지에 따라 매우 다른 해석이 도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산업혁명이 그렇습니다. 산업혁명 시기의 사람들 중 일부는 그 당시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조망할 시점이 되면서부터는 '혁명'이라고 정의를 하고, 또 한참 후에는 혁명이라는 표현은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과거에는 정보의 전달속도가 늦어서 한참 뒤에야 알게되는 일들이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퍼지지요. 그만큼 정보를 평가하는 과정도 짧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지요. 역사를 바라보는 시점과 집단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도 그렇다는 겁니다.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만일 정보를 현재시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시간이 흐른 뒤 과거를 회고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도시와 시골



존 쿳시의 '추락'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중반 정도까지 읽었는데요. 제가 잘 읽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시거주자와 시골거주자 간의 시각차이가 조금 느껴지더군요. 우리 흔히 이런 이야기 듣잖아요. '서울 애들은 깍쟁이야'. 이 책을 읽어보니 생각이 나더군요. 

'추락'에서 이야기 하는 바가 '도시와 시골'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도시인은 정말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느꼈습니다. 아마 도시인 간의 대화에서는 느끼지 못하겠죠.

'이웃들이 서로에게 음모를 꾸미고, 재앙을 바라고, 흉작을 기원하고, 돈 때문에 망하기를 바라다가도, 위기가 닥치면 손을 내밀어 돕는 게 시골생활이다.'라고 주인공은 이야기합니다. 시골생활이 정말 이런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도시와 시골의 시각차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요.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본다면 방어적인 태도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깐요. 그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기대됩니다.

2010년 7월 19일 월요일

김두식, '헌법의 풍경'

잠시 법학 공부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게 벌써 5년 전이네요. 내용은 다 잊어버리고 독특한 법률적 표현만 기억이 납니다ㅎ 그러다가 지난 4월에 김두식님의 '헌법의 풍경'을 읽어보았습니다. 뭐랄까. 정말 법학 공부하면서 가려운 부분들을 많이 긁어주셨더군요. 으례 법서들을 들추다보면 답답한 점이 많았는데 다소 해소되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공감이 되던 부분 중의 하나는 법률용어가 왜 그렇게 어렵게 쓰여졌는지에 대해서 입니다. '신체의 완전성을 침해했다'라는 것이 어떤 뜻일까요? 바로 상해를 입었다는 표현입니다. 대법원 판례를 읽다보면 종종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요. 저는 너무 어렵더군요. 쉽게 쓰여지면 더 많은 사람들은 친숙하게 법률상식을 쌓을 수 있을텐데 말이죠.

Kevin Bales: How to combat modern slavery

http://www.ted.com/talks/lang/eng/kevin_bales_how_to_combat_modern_slavery.html


TED에서 Kevin Bales가 modern slavery에 대해 강연을 했었습니다. 저개발국가의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벅찬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본권도 제한받으면서 살고 있지요. 세계의 자본은 기대수익률이 높은 곳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지만 왜 이분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을까요?

J.M. 쿳시 '추락'

김영하님의 팟캐스트 19회에 소개된 작품입니다. 지난 주에 팟캐스트를 듣고 나서 오늘 도서관에서 바로 빌렸네요ㅎ

지금 7장 정도까지 읽었는데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김영하님께서 말하신 것처럼 한 사람의 삶의 '균형'이 깨지는 것이 어떨지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설을 읽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우리의 일상과 같은, 평소같은 소설 속 이야기에는 관심을 덜 기울이는 것과 비슷하겠네요.